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론 음모론 (문단 편집) == 바로 보는 조선 붕당정치의 역사 == 사실 [[당의통략]]의 이야기는 그 맹약이 정말로 의도적이었냐는 점을 제외한다면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근본적으로 동-서 갈등은 정치의 오랜 현실이었던 훈신, 척신에 대한 친화도에서 시작됐다. 간단히 설명하면 애초에 승부가 난 게임이었다. 서인은 근본이 친외척 세력인 기호사림+경화사족이고, 동인은 근본이 반외척 세력인 영남사림이었다. 동인은 외척 전반과 그와 연대한 사림 전체를 척결대상으로 규정하며, 이른바 "4대 [[사화]]"와 [[연산군]]과 [[중종(조선)|중종]] 시절에 벌어진 옥사를 훈구파와 사림파의 오랜 대결로서 규정했다. 그러나 4대 사화나 연산군, 중종 시절에 벌어진 옥사의 실상은 성종 이후 대두한 영남(경상도)을 중심으로 한 영남 사림과 그 세력에 비판적인 기호 사림과 이들과 연대한 훈신, 척신간의 대립이다. 그러다보니 사림의 사관에서는 [[남곤]]이나 [[심정]], [[김안로]] 같은 사림 출신 권신들도 죄다 훈구파나 외척으로 부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일부는 어느정도 옳긴 하다. 그러나 남곤의 경우엔 남곤 자신이 억울하다고 할만한 일이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조선 [[명종(조선)|명종]]조에도 일부 사림은 [[윤원형]]에게 줄을 선 원죄가 있으며 그렇다고 [[인종(조선)|인종]]을 지지한 사림들이라고 [[윤임]]과 손을 안 잡은 것이 아니다. 명종조를 거치면서, 다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당시 4대 사화와 거듭된 옥사로 인해 관학파의 기질에 가까웠던 훈구파는 제거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 사림 출신 신하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선조(조선)|선조]] 시절에 사림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이후에 김효원은 윤원형의 집을 기웃거렸을 만큼 배경이 부족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런 신규 가문이니 만큼 건천동에서 살았고, 그래서 동인이 되었다. 반면 [[심의겸]]은 잘나가는 정동 사람이다. 그러니 서인이 되었다. 당장 [[정철]]만 보아도 금수저다. 율곡 [[이이(조선)|이이]]는 특별한 정파에 소속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러한 정치적 현실을 옹호하다보니 어느순간 서인의 거두가 되었던 반면, 동인들은 이를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선 순수 경상좌우도의 퇴계학파 사림집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조 시절에 동인이 훨씬 우세한 상황인데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서인으로 분류되었다. 남인은 한양에서 그야말로 "남산골 샌님"의 땅인 목멱산에 자리잡았다. 북인은 청계천 이북 거주자인데, 별다른 공통적 특성이 적은 [[서경덕]], [[조식(조선)|조식]] 학파인 비이황학파 연합 정도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남명학파의 강경파는 대북이 되었고, 외척(=인목왕후)와 연대한 온건파는 소북이 되었으며 류희분 등도 실제로 외척이었다. 이후에 영남 사림을 기반으로 한 북인과 남인은 서로에게 정쟁을 다퉜고 여기에 [[광해군]] 시절에 이어진 대옥사와 [[인조반정]],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소북과 대북을 비롯한 북인은 조정에서 사라졌고, 남인은 영남 지역보다 기호(경기도+충청도) 지방에서 집중함에 따라 동인이 기반으로 했던 영남 사림들은 쇠퇴하고 말았다. 인조반정 이후에 기호 사림을 기반으로 한 서인은 다시 공신들의 공서파와 산림의 청서파로 갈렸다. 공서파들은 효종의 책봉을 적극 지지했으나, 명분상에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고 결국 다수 숙청되었다. 산림의 현실적 힘을 인정한 [[효종(조선)|효종]]은 다시 [[청풍 김씨]] 가의 [[김육]]을 사돈 삼으면서 [[명성왕후]]를 책봉했고, 과연 명성왕후와 김우명, 김석주 등은 [[현종(조선)|현종]], [[숙종(조선)|숙종]]조에 서인 산림과 종친, 남인 사이의 적극적인 균형추 역할을 했다. 두 차례의 [[예송논쟁]]과 [[갑인환국]]은 서인 외척, 그리고 그와 손을 잡은 남인의 승리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그렇게 김석주가 적극 나선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이 대거 쫓겨나면서, 서인은 다시 친 외척파인 노론과 반 외척파인 소론으로 갈렸다. 이 과정에서 [[박세채]]는 일관적인 반 외척행보에 나서면서 처음에는 소론이었다가 뒤에는 노론이 되었다. 한편 1701년에 사사된 [[장희빈]]이 남인 출신이였기 때문에 세자([[경종(조선)|경종]])의 외척이 남인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노론은 반 외척파(반 경종파)가 되고, 소론은 친 외척파(친 경종파)가 되었다. 또한 소론이 반 외척파였던 시절에도 어느정도 소론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외척 조사석 및 오두인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숙종이 세자를 폐위하려고 하는 구상을 노론은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소론은 세자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노론이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며 소론과 노론의 각각 급진파(준론)와, 온건파(완론)의 대립까지 엮이게 되었다. 이후에 준노가 [[신임옥사]]로, 준소가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으로 제거되고, 완론 중심의 [[탕평책]]을 내세운 영조의 결론은 당파성을 강하게 띤 기호 사림보다 한양을 기반으로 한 경화사족과 외척을 중심으로 조정을 이끄는 것이었다. 한편 10살로 요절한 [[효장세자]]의 세자빈은 소론 조씨 출신이었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던 효순왕후는 세자의 사후 현빈으로 봉해졌다가 영조 27년 1751년 11월 14일 경복궁 자경전(慈慶殿)에서 소생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이듬해인 1752년 1월 22일 효장세자의 묘 왼쪽에 안장되었다.] 또 [[사도세자]]의 세자빈은 노론에서 상대적으로 한미한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였다.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의 경주 김씨 역시 주요 외척이 되었다. 그래서 영조 말기에는 드디어 조정이 외척간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노론 벽파가 되는 청명당은 정조 치세 내내 외척들을 쳐내는데 바빴다. 처음엔 [[김귀주]]와 손잡고 [[홍인한]] - [[정후겸]]을 내몰고, 다시 김귀주를 버리고 [[홍국영]]과 손잡고, 다시 홍국영을 버리고 시파에 적대의식을 보였다. 그러나 청명당(벽파)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당파였다. 자신들 역시 경주 김씨라는 외척 세력과 손을 잡은 상태였을 뿐더러, 정조의 동의에 의해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이점은 남인도 마찬가지여서, 벽파와 남인은 "주상전하는 참 훌륭하신데 왜 저놈들은 안 쫓아내실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조(조선)|정조]]는 이들을 두고 계속 시파를 견제했으며, 정순왕후 수렴통치기간에는 이들이 주류가 되었으나 [[김조순]]을 몰아낼 수도 없었다. 결국 정순왕후가 죽고 벽파는 이른바 팔자흉언사건으로 반정조, 반사도세자로 찍히며 하릴없이 숙청되어버린다. 그리고 벌어진 것은 19세기 조선의 외척 천하, 즉 [[세도정치]]였다.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 [[전주 이씨]] 선파([[흥선대원군]] 대) - [[여흥 민씨]](고종 친정 이후) 등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을 결국 멸망에 빠뜨리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